이천동
이천동(梨泉洞) 440번지(지금 미8군 병영 및 외인 아파트 등이 있음) 배나무가 있던 지역부터 현 건들바위가 있는 곳으로 흐르던 하천을 구내라 불렀다 한다.
신천이 생기기 전에는 물론 생긴 후 약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산 동쪽에서부터 건들바위 일대가 배나무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미나리꽝을 만들어 대구시민에게 미나리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주택지가 되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옛날 강물이 흘러가던 이 곳에 배를 묶어 두는 나루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조선초기 한문학을 집대성한 석학 서거정 선생은 이 곳 "삿갓바위에서 고기낚기"란 제목으로 대구십경을 노래했다고도 하나 지금은 건들바위만 홀로 서서 옛날의 물 맑은 시절 뛰어놀던 고기떼는 오간데 없고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만 귓전에 남아 구내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봉덕동
봉덕동(鳳德洞)은 원래 대구부 상수서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산동과 덕산동을 병합하여 봉덕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시켰다.
1918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는 동시에 일부를 떼어 대봉동에 넘겨 주었다. 이 곳은 큰 골의 동편으로 앞산공원의 일부와 고산골, 그리고 화교학교, 봉덕시장, 남구청 등이 있다. 지난 날에는 앞산 밑에 이 부근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삼정골이 있었고, 용두동 부근에는 용두산과 토성이 있었다. 큰 골의 동편에는 대명동의 서괘진과 산록부에 나란히 동괘진이란 마을이 있었다.
앞산공원 깊숙이 들어서면 은적사가 있고 안지랑이골의 안일암과 함께 고려왕조를 창건한 왕건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봉덕동은 3개로 구분되어 1,2,3동이 있으며, 봉덕1동 부근은 1929년경 대구중학 동남편 일대에 대구지역최초의 능금과수원이 있었는데, 그후 인근 경산, 하양 등지로 재배면적을 넓혀 나갔다고 전해진다.
고산골
신라 말엽 왕실에는 임금의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걱정이 컸다고 한다. 애가 탄 왕은 각지의 용한 의원을 모두 부르고 좋은 약을 다 썼지만 왕비의 몸에는 태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수 백 리 되는 곳에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면 소원을 이룬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튿날 왕의 명을 받은 신하는 경주 서쪽 지방을 돌아다닌지 보름만에 다다른 곳이 이 곳 고산골이었는데 앞뒤가 산으로 포근히 둘러싸인데다. 사시 사철 옥 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산세가 절 짓기에 안성 맞춤이었다. 왕은 곧 이 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고산사라 했다. 왕비는 이 절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곧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이듬해 또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대단히 기뻐하여 전국의 죄수를 석방하고 큰 잔치를 여는 한편 고산사에 3층 석탑을 기념으로 세웠다. 그 뒤 고산사에는 자식없는 부녀자들의 백일기도 행렬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전설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고산골이란 이름은 고산사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삼정골
삼정골은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 3동 대덕산 푸른 숲 계곡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전 (당시 경북 달성군 하수면)에는 10여 채 정도의 가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주민은 농업에 의존하고 살았다.
당시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점차 주민이 늘어나면서 식수 해결의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부터 40여 년전 주민들이 식수 해결을 위해 여러 곳에 우물을 파 보았으나 물이 나오지 않거나 물이 나더라도 금방 말라 버려 여러 번 헛수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 중 가장 웃어른이 백일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백일 기도가 끝날 무렵 어느 날 밤 꿈에 수염이 허옇고 긴 지팡이를 짚고 대덕산 꼭대기에 나타난 산신령이 이르기를 "숭늉물에 먹을 풀어 양동이에 담아 한 밤중에 별 셋이 양동이에 들어오는 곳을 찾아 우물을 파라"고 하여 이에 온 주민이 힘을 합하여 제사를 드린 후 숭늉물에 먹을 푼 양동이에 별 셋이 들어 오는 장소를 찾아 우물을 파니, 이 우물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 사람의 새 젖줄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있던 두 개의 우물에 한 개의 우물이 더 생겨 우물이 세 개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삼정골로 붙여졌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부터 상수도 시설로 인해 원래 있던 두 개의 우물은 메워졌다.
강당골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 3동 미리내아파트 남쪽 도로에서 효명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신천에 닿는 도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계곡을 강당골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아스팔트로 깨끗이 포장되어 계곡의 흐르는 물을 찾아볼 수 없으나 미리내 아파트와 효명초등학교를 짓기전에는 계곡의 윤곽이 완전히 드러나 지금의 효명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소나무 부근에서 맞은편 산과 연결시켜 저수지 비슷하게 만들어 그 아래쪽에 있는 토지에 관수를 시켰으며 앞산의 푸른 숲과 골짜기의 맑은 물의 풍치를 살려 제방 주위에 나자 모양의 누각이 있었고 이 누각을 관리하는 별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부터 약 40년 전부터는 이 별동의 건물을 강당이라 불렀고 명절에는 윷놀이등 민속놀이의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평상시에는 노인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이 계곡의 하류에 있는 누각과 별동의 건물의 명칭을 본따 이 계곡을 강당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류에 있었던 누각은 모습을 볼 수는 없어도 그 자취만은 엿볼 수 있으나, 상류의 누각은 미리내 아파트가 들어섬으로 흔적마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골짜기의 물 또한 시멘트 배수관을 이용하여 완전히 땅속으로 묻어 신천으로 바로 연결시켜 주고 있다.
매화골
현재 남구 봉덕 1동 743번지 일대는 주택가로서 대구시의 중심부에 속해 있으나 지금부터 3, 40년전만 해도 과수원과 농지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특히 743번지(신일교회 근처) 일대는 몇채의 집들이 모여서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마을 주변에는 매화나무가 많아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서 사람들은 그 곳을 매화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 대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과수나무는 물론 오랫동안 많은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매화나무들도 한 그루 두 그루 절단되었고 그 자리는 주택이나 도로로 바뀌어 그 옛날의 모습은 흔적 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명동
대명동(大明洞)이라는 동명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에서 연유된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명나라제독 이여송과 함께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작전계획 수립에 항상 참여했고, 조선군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도 우리 조선군과 전략 전술상 긴밀한 협의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수였으며, 그의 활동과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그에게 대구시내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해 주었다. 그 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그는 자기가 받은 땅을 모두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편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누리는 행복이었기에 고향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눈물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 었다. 이에 두사충은 최정산(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지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안지랑이골
지금부터 천여 년전, 싸우다가 도망가던 고려의 왕건이 기진맥진한 채 비슬산 기슭에 이르러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바위가 대구 앞산 안지랑골에 있다. 약수터로 알려진 이곳의 전설은 거짓말인 것이 거의 분명한 것이 역사를 보면 고려 군사가 대구 근방에서 싸운 것은 왕건과 견훤의 싸움뿐인데 이때 패주한 왕건은 비슬산 쪽으로 간 것이 아니고 경산쪽으로 갔다 고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전설을 안고 있는 안지랑이 4,5십년 전에는 대구 제일인 여름 안식처였다. 당시 그 곳은 지금과 같이 메마르지 않고 산림이 울창했고 중턱에 있는 안일암과 더불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대구 시민은 연중행사처럼 여름철이면 거기를 찾아 들었다. 광목이나 삼베로 개울에 천막을 치고 약수에 목욕을 하는 것이 시민의 그지없는 낙이었다.
더구나 엉성한 가설 천막사이로 벌거벗은 여인들이 물을 덮어쓰며 시원해 하는 광경들은 오랫동안 시민들 사이의 화제로 남아 있었다. 그 때 시민들은 약수터에 가는 것을 일종의 레크리에이션인 동시에 보건 하는 한 가지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무더운 날이면 솥과 냄비와 반찬을 준비한 가족 야유회가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좀 넉넉한 사람들은 산밑까지 마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마차는 지금 대신동파출소 있는 곳에서 출발했는데 전세와 합승마차 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나 상급관리들은 그 당시로는 최고급인 '하이야'를 타고 가기도 했다. 저녁노을이 질 듯한 저녁때가 되면 안지랑이골 밑에 70여대의 마차가 줄을 지어 서고 몇 대의 하이야 까지 끼어 일대장관을 이루었다. 이 곳은 특히 가정주부들이 좋아했던 것인지 많은 여인들이 한둘 혹은 몇 사람 이 어울려서 수십명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가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안지랑골서 물맞고 오다가 기에서 소나기 맞고 집에 와서 남편한테 매맞는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해가 기울어지면 이 번잡한 야외향연도 시들해지고 여기저기 노랫소리와 함께 술에 취하고 물에 취한 남녀들이 비틀거리며 내려온다. 특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나온 여인들이 장고를 치고 춤으로 너울거리면서 (20여년전에는 없었지만) 대명동 공동묘지 길을 넘어오는 광경은 기이했다.
여기저기 긴 그림자를 몰고 솟은 무덤사이로 흥겨워서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는 여자들의 모양은 인생무상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약수터는 이 곳 뿐만 아니라 영천의 황토물터, 가창의 약수터, 칠곡의 나박탕 등이 인기가 있었다. 특히 옥포 용연사 약수터는 제일 인기가 있었다. 이 곳은 일인이 관리를 하고 있어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일인은 지독한 구두쇠라고 한푼도 에누리를 하지 않았다는데 한국 땅에서 나오는 한국인의 물을 왜놈이 돈 받고 판단해서 비난이 높았다. 마침내 그런 꼴을 보고만 있던 그 왜인의 고용인이었던 한 한국청년이 그 자를 찔러 죽여 버렸다.
일본 경찰은 이 민족적 살인범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 용감한 청년은 오늘날까지 이름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일본의 억압과 학대 속에서도 대구 시민은 이런 약수터를 그들의 유일한 휴양처로 삼고 즐겨왔다.
야시골
'야시골'은 현재의 남대구 우체국 건너편 일대를 일컫는 것으로서 원래 이름은 여의곡이었다고 한다. 여의곡이라는 이름은 양녕대군이 대구에 왔을 때 "뜻대로 되는 마을"(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음)이라는 뜻에서 지은 것이라는데 그러던 것이 말이 변해서 야시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로 야시란 여우를 말하는데 유래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여우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알고 있으나 "여의"가 세월이 흐르면서 '여의-여수-여시-야시'의 형태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전해진다 한다.
종지골
현재 대명3동 2254번지 부근을 종지골이라고 한다. 아마 산의 모양이 종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이 주위에는 새모당 또는 새못(깊이 15m정도 추정)이라고 불리는 저수지가 현 놀이터 부근에 있었는데 이 저수지의 수원이 남구 봉덕동의 용두천의 물이었다고 한다. 어느해 겨울 눈이 왔을때 노루가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수로를 만들었는데 못 밑 300여 두락 논에 가뭄 걱정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종지골 부근에는 공동묘지가 많았는데, 이 공동묘지는 남산 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현재의 대명 7동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도시의 번창에 밀려 대명 7동의 공동묘지를 다시 이전할 때 숫자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묘가 많아 묘마다 산대를 꽂아 그 수를 세어 묘지의 수를 확인하고 주인 없는 묘지는 뼈를 전부 모아 한 곳에 이장하였다고 한다.
이 곳 주변은 큰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고 감나무도 많았고, 밤이 되면 도깨비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부근에 여회골이 있었는데 이 여회골은 고려 태조 왕건이 전쟁으로 앞산까지 왔다가 군사들이 종지골에서 승리를 거두고 난 뒤 왕과 재회하고 축하연을 가진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괘진과 동괘진
대명 9동의 옛 이름은 서괘진이라고 한다. 괘진이란 지명은 이곳을 대대로 살 곳으로 정한 두사충이 이 곳이 강가는 아니지만 강의 모습과 같이 생겼고 나룻배가 닿는 곳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괘진(掛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괘진과 동괘진의 분기점은 현재 앞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현충로로, 서쪽이 서괘진 동쪽이 동괘진에 해당된다. 그중 서괘진은 옛날 안지랑골 또는 안지랑이로 불리는 곳이며 대구 시민들의 휴식처로 널리 이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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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수정일 :
- 2022.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