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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락길 이야기

산,대왕을 품다

  • 대구 남구청이 펴낸 앞산과 왕건(877~943)의 이야기를 담은 책 -'산, 대왕을 품다
    • 대구 앞산에 잠시 머물렀던 고려 태조 왕건이 되살아났다. 왕건이 927년 9월 팔공산에서 후백제 견훤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크게 패한 뒤 앞산으로 몸을 숨겨 고려 건국의 불씨를 살렸다는 내용을 235쪽 분량에 담았다. 책에는 앞산의 고산굴과 은적사, 안일사 등 왕건이 생활한 흔적이 남아있는 곳과 최근 도심 재생 사업을 통해 관광지로 꾸민 공간을 사진과 함께 담았다.

      남구는 책을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앞산 구석구석을 답사하며 자료를 모았다. 내용은 왕건이 팔공산에서 탈출해 홀몸으로 앞산으로 숨어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건은 앞산 꼭대기 왕굴에서 며칠 동안 숨어 지내다 후백제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벽진(경북성주)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전해온다. 이를 바탕으로 왕건이 2년 동안 앞산에서 살았다는 가정 아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집필은 소설가 조두진(46.매일신문 기자)씨가 맡았다.

      남구는 500권을 제작해 주민센터와 학교, 도서관 등에 배부했다. 이 책을 바탕으로 앞산 홍보 영상을 담은 DVD를 제작하고 연극과 뮤지컬 등으로도 만들 계획이다.

    • 산,대왕을 품다

고산골

  • 신라말엽 왕실에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근심이 컸던 왕은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수 백 리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하여 지금의 고산골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고산사'라 하였다. 이듬해 왕비가 백일기도를 드리고 왕자를 낳자 왕은 대단히 기뻐하여 고산사에 3층 석탑을 세웠다. 고산골이란 명칭은 이 고산사에서 유래되었으며 고산사는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지금의 법장사가 재건되었다.
    • 고산사 전경모습 고산사 3층석탑 전경모습

강당골

  • 현재 효명초등학교 운동장 자리에는 학교가 들어서기전 앞산의 계곡물을 담아 토지관수를 위한 저수지가 있었으며, 그 제방주위에 앞산의 품광을 감상할 수 있는 ㄴ자 모양의 누각이 있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별동의 건물을 지어 그 이름을 '강당'이라 불렀으며, 공연장이나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이에 계곡의 하류에 있는 누각과 별동 건물의 명칭을 본따 이곳을 '강당골'이라고 하였다.
    • 강당골 솟대 전경

은적사

  • 은적사는 서기 926년 신라 경애왕 3년에 창건된 절로서 그 이름의 유래에는 왕건과 견훤의 역사적 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공산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고 도망치던 왕건은 팔공산을 거쳐 앞산으로 숨어들었으며, 현재 은적사 대웅전 자리 우측의 대나무 숲속 동굴에 3일간 피신해 있었다. 이 굴은 신묘하게도 왕건이 숨자 왕거미가 출입구에 거미줄을 쳐주어 적군들의 추적을 따돌려 주었다고 한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왕건이 당시의 고승 영도대사로 하여금 숨을 '은(隱)', 자취 '적(跡)'을 써 은적사라는 절을 짓게 하였다.
    • 은적사 전경 은적사 전경 정면

꽃무릇

  • 꽃무릇은 다른 말로 피안화(彼岸華)라고 하기도 한다. 9~10월경 꽃이 완전하게 진 후 잎이 자라나 눈 속에서 겨울을 보내고 여름에는 자취도 없이 지내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붉은 꽃을 피우는데 그 모습이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오른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 꽃은 흔히 절에서 심는데, 거기에는 또 다른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꽃의 비늘줄기에서 녹말을 얻어 제본이나 탱화를 표구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방에서는 꽃무릇의 비늘줄기를 약재로 사용하며 약명은 석산(石蒜)이다.
    • 꽃무릇

안지랑골

  • 안지랑골, 안지랑이 또는 안지랭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때 수많은 피서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으로 그 유래는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이 골짜기에 숨어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부터 본래 '안좌령(安坐嶺)'으로 양녕대군이 피난와서 머무르던 곳이었는데 살펴보니 대구가 살기 좋은 곳이고 자신이 편히 있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까지 다양하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말이 변해 지금의 안지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유래로는 이 계곡의 물이 특별하여 피부병이 있는 사람이 이물에 씻으면 고름이 툭툭 터지고 가려움증이 가신다고 하여 백리밖에서도 가마를 타고와 씻고 가기도 하였으며 앉은뱅이도 일어섰다고 하여 안지랑이라 불린다는 설, 또한 대구 중심가에서 안지랑이 계곡을 보면 물안개가 핀 모습이 아지랑이가 가득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하여 안지랑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안지랑광장에서 체조하는 시민들 안지랑골 항공사진

안일사

  • 안일사는 원래 유성사라 불리던 절로서 은적사에서 3일간 머무른 왕건이 다시 왕굴에 와서 피신한 뒤 이 곳 안일사에서 편안히 피난하고 쉬어갔다고 해서 편안할 '안(安)', 편안할 '일(逸)'로 하여 안일사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왕이 피신했다 하여 왕굴이라 불리는 굴은 견훤의 부대가 왕건을 찾으려 근처에 다다르자 갑자기 운해(雲海)가 가득하고 왕거미줄이 쳐져 크지 않은 굴인데도 사람이 피신했는지 안했는지 흔적조차 알수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무사히 위험을 피하고 고려창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안일사 항공사진 왕굴 입구사진

골안골

  • 골안골은 본래 골짜기 사이 가느다란 골짜기란 뜻의 세골 또는 가는골, 골안 등이라 불리웠으며, 해방 후 무당들이 많이 모여들어 기도를 드린 계곡이라 하여 무당골이라고도 불리웠다. 지금처럼 공인된 신앙이 없었던 시절 시골 마을에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오는 길목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게 하나쯤 있었다. 작은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마치 작은 돌탑과도 같은데 지나는 사람들이 오가며 돌 하나씩 주워 돌탑 위에 얹어놓고 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곤 했다. 집안의 길흉화복에서부터 마을의 대소사까지 세상살이에 시달리고 힘든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마음을 내려놓는 장소였던 이곳에서 작은 소원하나 소박한 돌하나에 담아 빌어보자.
    • 솟대와 돌무덤 사진 돌무덤 사진

대명동

  • 대명동이란 동명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에서 연유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를 도우러온 두사충은 임진왜란 평정에 중요한 활동과 높은 공적을 세운 장수로 평가되고 있으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우리나라로 와 조선에 귀화한 장수이다. 수만 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렸으나 고향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을 잊지못하고 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였다고 한다.
    • 대명동 항공사진 대명동 대덕산 전경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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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과 이경옥 664-2852
최근자료수정일 :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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